[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4
니시이마자토(西今里) 중학교에서 나카오사카(中大阪)조선초급학교로 (글 이상영)
시련의 시대를 넘어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東成区)에 있는 나카오사카(中大阪)조선초급학교는 1948년에 설립된 조련(재일조선인연맹)히가시나리학원(東成学園)을 그 뿌리로 두고 있다. 이듬해 학교폐쇄령에 의해 빈사상태로 내몰렸던 민족교육이지만, 그 명맥은 같은 장소에 개교한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大阪市立西今里中学校)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포들은 친근감을 담아서 이 학교를 우리말 발음으로 <서금리중학교>로 부른다.
폐쇄,그리고 공립학교로…
조국해방 후,히가시나리(東成) 지역에는 네개의 조선소학교가 탄생했다.통합에의 움직임이 거세지자 48년 1월20일.오사카시측과의 교섭을 거쳐 시소유지인 반도우(阪東)국민학교 부지에 신교사를 건설하여 조련히가시나리학원 소학교·중학교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현재의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中大阪朝鮮初級学校)의 소재지로서 이 학교는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48년 4.24교육투쟁을 거쳐, 다음해 49년 3월 1일부로 오사카부(府)는 재단법인 오사카조련학원이 설치됨에 따라 부(府)산하 조선학교 24개교를 사립학교로 인가한다. 당시 히가시나리학원에는 소·중학교 합쳐서 8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으나, 9월 8일 조선학교 폐쇄령에 의해 학교 문을 닫아야만 했다.
- 니시이마자토 중학교 교사 -
- 오사카시립중학교 제5회종합체육대회 축구부문에서 우승한 선수들(56년)-
당시 요시다(吉田)내각은 <조선인 자녀의 의무교육은 공립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고 각의결정하고, 이에 따른 두 개의 문부사무차관통달이 각 도도부현 지사에게 내려진다. 그 중에는 <학교폐쇄의 대체조치로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특설학급 또는 조선인분교를 설치해도 좋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뒤에서 설명할 니시이마자토(西今里)중학교는 이 규정에 의거해 설립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공립학교로 전입학하게 된 조선인 아동·학생은 부(府)내에서도 9,687명에 달했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존속을 요구하는 재일조선인의 저항으로 행정적인 전입학조치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 때문에 오사카시는 50년 3월, 조선인 미취학학생들에 대한 교육기회보장을 내세워 시립중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정. 구(旧)조련히가시나리학원의 부지와 교사를 사용하여 개교를 준비했다.
같은 해 7월 1일, 오사카시립 혼조(本庄)중학교 니시이마자토분교가 개교해 이듬해인 51년부터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西今里)중학교로 개칭. 한자표기와 함께 우리말로 <서금리중학교>로 쓴 현판을 걸게 되었다고 한다.
- 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 학생들과 교원(3학년1반 1959년)-
조일(朝日)공동의 노력
개교 당시의 학생은 180명으로 교사는 목조 2층 건물. 초대교장은 나중에 일조(日朝)협회오사카지부부위원장도 역임한 가와무라 이치베이(川村市兵衛)씨. 교원은 일본인과 조선인 둘 다 있었다. 조선말, 역사 같은 민족과목은 조선인 선생님이, 다른 과목은 일본인 선생님이 가르쳤다고 한다. 교육내용은 자주학교에서 진행되던 것과 거의 같은 민족교육이었다.
총련결성 직후인 55년 9월부터 61년까지 이 학교의 교원이었던 역사학자 박종명씨(86)는 개교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김평화(金平和)라는 히가시나리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 분이 있었는데, 동포들의 힘을 이 사람이 결집시켰어. 개교는 이 사람의 공로가 컸지. …동포들은 어떻게든 이 장소에 학교를 만들자며, 이것을 돌파구로 각지에 학교를 부활시키려고 했어. 계속되는 조선사람의 항의와 요청에 골머리를 앓던 시(市)로서는 '김빼기'를 할 필요가 있었지. 어떻게든 시립학교로서, 교육위원회의 통제가 가능한 범위에서 말이야. 쌍방의 이해관계가 표면적으로는 일치한 셈이지."
이꾸노구(生野区)에 사는 문우평(文友平, 75)씨는 50년대 중반, 이 학교를 다녔다.
"오사카부 전역을 포함해서, 나라(奈良), 와까야마(和歌山), 효고(兵庫)에서도 학생이 왔었어. 조선학교가 폐쇄되었으니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입학하거나, 계속 일본학교만 다니다가 편입하거나 사정은 여러 가지였지. 나이도 제각각이었어."
문씨도 다니고 있던 츠루하시(鶴橋)조선소학교가 폐쇄된 후에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중학교 1학년 때에 친척을 따라 도쿄조선제1초급학교 5학년에 재입학하고 도립조선인중고등학교 중등부 1학년 때에 오사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설은 빈약했지만 학교생활은 즐거웠어. 소조는 취주악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등교해서 운동장에서 놀았거든. 학교대표로 일본학교의 운동회에 대항릴레이에 출장했던 적도 있었지."
나중에 나카오사카(中大阪)조선초중급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한 문씨는 니시이마자토(西今里) 시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의 자치회 활동을 지도했던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학교를 좀 더 좋게 만들까, 학생들 자신이 의견을 내고 협의하는 자주적인 분위기였지. 학교가 지도하는 것 이상으로, 먼저 지혜를 서로 내놓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겼어."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昭)씨, 모리타 쿄스케(森田恭介)씨 등 일본인 교원들 중에는 민족교육을 이해해 주는 진보적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행정기관 측에서 보면 <문제 있는 교원>이지만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지. 본래는 학생들을 전인격적으로 대해야하지만, 민족교육의 성질상 제약이 있어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학생들도 그런 교원들을 잘 따랐죠."
- 조련 히가시나리학원 제2기 학생들(1949년)-
11년 역사의 막
귀국운동이 시작된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급증했다. 59년에는 처음으로 1,000명을 돌파(1,163명)했고, 61년에는 2,059명까지 불어났다. 교실이 부족해지자 운동장에 조립식 교실이 만들어졌다. 한편, 57년 시교육위원회가 <공립학교로서는 니시이마자토 중학교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학교교육회 측에 협의를 요청해오자 자주화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학교교육회는 자주화의 조건으로서 시 측에 다음 4가지를 요구했다.
- 학교의 법적인가
- 토지건물설비의 무상양도
- 교육원조비의 지급
- 퇴직하는 일본인 교원의 희망에 근거해 배치전환
쌍방은 61년 7월 1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한 각서를 교환한다.
- 학생 전원을 오사카조선중급학교로 이동
- 계속해서 학생 전원에 대해 교육비 교부
- 시 소유의 토지건물및 비품을 64년 3월말까지 무상사용
8월 1일, 오사카부는 재단법인 오사카조선학원 또는 각종학교 오사카조선중급학교의 설립을 인가했다. 같은 달 31일부로 시립니시이마자토(市立西今里)중학교는 폐교되고, 학생들은 신설된 나카오사카(中大阪)조선초중급학교와 히가시오사카(東大阪)조선중급학교 두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니시이마자토중학교의 역사는 11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그 존재는 해방 직후부터 민족교육 전통 안에서 특이한 지위를 갖고 있다.
"지역 민족교육의 사수와 발전을 위한 중심지"
나까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 안에 있는 민족교육역사자료실은 이 학교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 월간<이어> 2015년 4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