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치바조선초중급학교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 치바(千葉)조선초중급학교 (글 이상영)
새 교사 건설에 쏟은 열정
2016년 창립 70주년을 맞는 치바(千葉)조선초중급학교.
폐쇄 당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고 ‘조선학교, 누더기 학교’라는 놀림을 당하면서도 1963년 신(新)교사를 건설해 새로운 출발을 맞기까지는 상공인과 활동가, 동포들의 헌신과 정열이 있었다.
- 63년 1월 10일 준공한 초대 교사(校舍) -
아동 7명으로 시작
이 학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있다. <치바(千葉)에서의 민족교육사업을 회고하며>(이하 「회고」)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치바현의 민족교육의 발전에 전념한 고 이태운(李泰云)씨가 저술했다. 아래는 이 책자를 바탕으로 치바조선초중급학교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알아본다.
1945년 조국 해방 후, 치바시 이마이쵸(今井町)에서 노성용씨(故人, 치바조선초중급학교의 제2대 교장을 지낸 고 노재옥씨의 부친)의 지도아래 아동 7명으로 시작한 국어강습소가 치바현 민족교육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46년 4월부터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일본 각지에 있던 국어강습소를 6년제 초등학원으로 개편하는 조치를 강구하자, 같은 해 9월 13일 조련치바초등학원(이마이쵸)이 개설된다. 치바조선초중급학교는 이 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이마이쵸를 포함한 소가(蘇我)역 일대는 당시 고타뽀(五田保)라 불렀던 현 내 굴지의 조선인 집단 거주지역이였다. 히타치(日立)항공기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함바(飯場, 노역자들의 합숙소)에 많이 살았다. 당시 치바초등학원에 다녔던 강동훈씨(康東勳, 78)에 따르면, 교사(校舍)는 치바은행 소가(蘇我)출장소였던 건물로 조련의 현(県)본부가 접수해 사무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이마이쵸의 국어강습소에 다녔던 강씨는 아버지가 데리고 간 새로운 학교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연필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후 10월에는 후나바시(船橋)초등학원이 개설되었고, 같은 해 토오카츠(東葛), 키사라즈(木更津), 다테야마(館山), 요코시바(横芝), 시게하라(茂原)의 각 학원이 문을 열었다.(아동수는 7개 학교를 합쳐 386명). 그러나 49년 10월에 내려진 학교폐쇄령으로 현내 각 학교는 개설한지 3년 만에 문을 닫게 된다.
- 후나바시(船橋)조선초급학교 졸업식 (61년) -
‘누더기 학교’로 놀림 당하며
일본당국에 의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48년 6월, 이마이쵸에서 현재의 미나미쵸(南町)에 해당하는 장소로 이전한 이 학교가 유일하게 치바현 제1조선인소학교로 남았고, ‘자주적’으로 운영되었다. 강씨 말에 따르면 학교 폐쇄로 인해 학생들이 조선학교 맞은편에 있는 소가소학교(蘇我小学校)로 다녀야 했고, 오후에는 교내에 설치된 <민족학급>에서 수업을 해야 되었으나, 오후가 되어 아이들이 향한 곳은 이미 폐쇄되어버린 조선학교였다.
50년대에 들어서자 자주학교로 복귀하자는 흐름이 거세져 갔다. 55년 5월 총련 결성을 계기로 제1소학교는 치바(千葉)조선초급학교로 개칭되고, 56년에는 후나바시(船橋)초급학교가 탄생했다.
50년대 후반에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학생 수가 급증한다. 57년, 58년 2년 사이에 치바초급학교에 중급부가 병설되었다. 당시 치바와 후나바시 양쪽 학교 모두 심각할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였다.
“근처에 있는 일본학교 학생들이 ‘조선학교, 누더기 학교’라고 놀리고 깔보았지요.”
당시 후나바시초급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던 이근애(李槿愛, 80)씨의 말이다.
“창문 유리는 깨져있고, 칠판은 먹으로 까맣게 칠해서 썼어요. 시험을 봐야는데 종이도 없고, 수업때 쓸 분필도 없었지요. 그 때마다 교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문방구에서 사가지고 와 겨우겨우 수업을 하곤 했죠. 57년에 조국에서 교육원조비를 보내와서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답니다.”
- 치바(千葉)조선초급학교 학생, 교원들 (61년) -
난항을 거듭했던 학교부지 찾기
60년대에 들어서 치바와 후나바시에 있는 두 초급학교를 통합해 중급부까지 민들자는 구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61년 11월, 치바조선초중급학교 건설위원회가 발족. 건설위원회 위원장에 안수열(故 安寿烈)씨, 사무국장에는 이태운(李泰云)씨가 임명되었다. 총예산 5,500만엔으로 철골 2층 교사를 짓고, 토지는 치바와 후나바시를 중심으로 환경과 교통이 좋은 장소를 1000평정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부지 찾기가 급선무였다. 「회고」에 의하면 당시 어느 동포의 소개로 국철 신캐미가와역(新検見川駅) 주변에 있던 2천평 가량의 농지를 찾아냈다. 62년 2월 16일, 땅주인에게 선금을 지불하고 월말에 잔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본 등기를 약속했지만, 이 정보를 알게 된 공안당국이 방해를 시작한다. 약속했던 날로부터 며칠 후, 일본 경찰이 땅주인을 찾아가 ‘농지를 조선인학교의 건설용지로 팔면 농지법 위반이 된다’며 위협했다. 이에 굴복한 땅주인이 학교 측과의 약속을 져버렸고 이 때문에 토지 구입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은밀하게 토지 구입을 추진한 학교 측은 현재 학교가 세워진 나니와쵸(浪花町)에서 천평의 주택용지를 판매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국철과 케이세이선(京成線) 역에서 1Km 이내라는 교통의 편리함도 좋은 조건이었다. 학교 측은 소유자와의 교섭을 신속하게 끝냈다. 무사히 구입계약을 체결하고 드디어 용지를 확보했다.
- 치바조선초중급학교 기공식에서 환호하는 동포들(1962. 3. 6) -
착공은 62년 3월 6일. 건설위원장을 필두로 상공인들이 막대한 건설자금을 갹출했고, 동포들도 ‘집집마다 매일 5엔 저금운동’과 폐품수집, ‘반찬 절약운동’등을 전개해 돈을 모았다. 현 내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대거 공사에 참가했다.
같은 해 4월 1일, 치바조선초중급학교가 만들어졌고 준공식이 있던 63년 1월 10일에는 한겨울 추운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1,200여명의 동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후나바시시(船橋市)에 살고 있는 주계자(朱桂子, 66)씨는 치바조선중급학교 제1기 졸업생이다. 초급부 6학년 때 일본학교에서 후나바시조선초급학교로 편입한 이후 도쿄조선중고급학교 중급부로 진학했고 치바초중급학교 탄생과 함께 이 학교로 옮겼다.
“조선학교에 다녀서 좋았던 것은 모두 형제들 같은 사이였다는 거에요. 일본학교에서는 조선인이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으니까요. 조선학교에 다닌 후에는 성격까지 밝아졌어요. 새 교사에서 공부한 건 1년 남짓이었지만 이 학교의 졸업생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 월간<이어> 2015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