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가와사끼조선초급학교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7 가와사끼(川崎)조선초급학교
(글 황리애)
교사 증축, 양돈… 독자적인 노력으로 학교존속에 온 힘을 쏟다
가와사끼(川崎)조선초급학교에 얽힌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있다. 일본의 공립소학교 분교에서 자주 학교로 이관되었을 당시에 촬영된 것이다. 가와사끼지역에서 민족교육의 시작부터 「학교폐쇄령」을 거쳐 동포들의 힘으로 다시 민족교육을 개시하게 될 때까지의 시기를 되돌아본다.
- 자주학교가 된 교사 앞에서. 사진 중앙이 당시 교장 김상호씨 -
노동자들의 숙소를 개조해 배움터로
가와사끼지역의 민족교육 태동은 1945년 10월 1일, 사쿠라모토(桜本)를 시작으로 군덴마에(群電前), 나까도메(中留)、이리에자키(入江崎), 오다(小田)、아사다(浅田), 와타리다(渡田)등 각지에서 개설된 국어강습소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권방득(權邦得)씨가 교장을 맡은 가와사끼조련제1학원이 나까도메에 생겼고, 이리에자키(入江崎)에 가와사키조련제2학원이 설립되었다.
제2학원에서 교장을 역임한 김점술(金点述)씨의 아들인 김삼호씨(金三浩, 83)는 “아버지가 공장 하청 등의 일을 하던 노동자 숙소를 개조해 학교를 만들었어요. 조선에서 교육을 받은 종업원이 있어서 그 사람이 강사를 했습니다”고 당시의 광경을 회상한다.
그 후 아동수가 늘어남에 따라 규모가 큰 학교가 필요했던 가와사끼 동포들은 행정기관과 교섭을 통해 공습으로 불에 타버린 시립오오시마소학교(市立大島小学校) 부지를 빌려 46년 11월 1일 가와사끼조련초등학원을 세웠다. 가와사끼조선초급학교의 창립일은 이 날로 정해져 있다.
가와사끼 동포 유지들이 만든 동인지 <대동강>(53년 7월 창간)에서 동포 김건수(金建洙)씨는 “그토록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화재 흔적들을 처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많은 동포들이 34일 동안 봉사로 참여한 처리작업의 손길은 학교 부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까지 이르렀다”고 회상했다. 아동 100명에 교원이 3명, 교실은 3개였다고 한다. 47년에는 학교명을 가와사끼조련초등학원으로 개칭. 아동수도 늘어나 48년 2월 시점에 교원이 6명, 학생 수는 350명 이상에 달했다.
- 가와사끼 조련초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동들 -
지혜, 힘, 돈을 모아 저항
48년, 문부성에서 내린 통달 『조선인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해』에 의해 일본 각지에서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 널리 펼쳐지는 가운데, 가와사끼에서는 교사 증설에 힘을 쏟는 것으로 자신들의 민족교육권을 주장했다. 같은 해 8월 1일자 해방신문에는 「한신교육투쟁 사건에 발분 / 교사증축으로 결기 / 가와사끼초등학관 건축에 착수」라는 제목으로 <가와사끼초등학교 관리조합에서는 4·24교육투쟁사건을 계기로 학부모를 비롯한 일반 동포들에게 당국의 음모를 철저히 폭로해 이후 어떤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지체 없이 교사증축 건설준비회를 구성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 결과 150만 엔을 모아 교실 2개가 증축되었고, 증축낙성기념운동회에는 남녀노소 동포들이 모여 그 성과의 기쁨을 나누었다.
덧붙여 학교운영비에 대해 동포 정백운(鄭白雲)씨가 8월 6일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에는 “앞으로 학교운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조합비에만 매달리는 것만으론 불안하다, 그리고 동포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생스럽겠지만 양돈(養豚)을 하기로 결정했다 …… 스물 네 댓 마리의 돼지들은 처마 밑에서 실하게 살이 오르는 호박처럼 모두를 흐뭇하게 한다.”고 써있다. 가와사끼 동포들이 지혜를 모아 학교 유지에 온 힘을 쏟은 것이 엿보인다.
그러나 다음해 9월 8일 『단체등기정령』에 이은 10월 19일 『조선인학교폐쇄령』에 의해 가와사끼조련초등학원도 학교 문을 닫게 되고 만다. 당시 가나가와신문에는 현 내 각 학교의 모습이 게재되었는데, <가와사끼 본교도 한때 분쟁이 있었다>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가와사끼현 지방과 공무원 5명이 오후 3시에 현장에 나가 교장 김씨 등 5명의 대표와 회견, 교섭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 학부형 약 2백 명은 교정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여기에 아이들의 합창소리까지 더해져 … 한 때 소란이 극에 달했으나 오후 4시 반부터 학교가 접수되는 것을 받아들였고, 무장경관 3백 명의 포위와 경계 속에 이날 오후 6시 분쟁이 종료되었다.>
- 가와사끼조련초등학교 제1기생들-
아이들에게 자주적인 민족교육을
학교가 접수된 후에도 학생과 동포, 학교관계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가와사끼시 현청을 방문해 항의와 교섭을 벌였다. 동포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학교가 폐쇄된지 16일 후인 11월 4일, 가와사끼조련초등학원은 가와사끼 시립 사쿠라모토(桜本)소학교의 분교로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학교의 콘도아키라(近藤あきら)교장은 복교식(復校式)에서 “여러분들이 학교를 지켜낸 것을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가방을 메고 비에 젖은 채 하염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울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디고 헤쳐 나가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 인상적인 기록도 남아있다.
사쿠라모토소학교는 교사가 좁아 접수되었던 원래 교사에서 수업이 일시적으로 이뤄졌다. 분교에는 9명의 일본인 교원이 와서 일본어와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남은 조선인교원도 교단에 섰다. 또 51년에는 김건수씨가 교장으로 복귀해 5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 이듬해 학교명이 가와사키조선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 총련결성을 전후로 일본 각지에서는 각종학교인가를 획득해 자주학교로서 민족교육의 발전을 요구하는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런 가운데 학교법인 가나가와조선학원이 인가를 받은 것은 65년 12월 24일. 가와사키초급학교는 다음해 66년 2월 1일에 자주학교로 이관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앞서 얘기한 김삼호씨는 64년 4월부터 66년 3월까지 이 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현 가와사키조선초급학교의 강문석(姜文錫 56)교장도 자주학교로 이관 되었을 때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학교를 그만두는 일본인 선생님들을 위해 환송회를 열어 꽃다발을 전달했다. 당시엔 어려서 크게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의의 깊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와사끼조선초급학교>라고 종이에 학교명을 써 붙인 간판 아래에서 교장선생이 기뻐하며 말씀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김삼호씨는 당시의 배경에 대해 “솔직히 가나가와현은 전국적으로 보아도 자주학교로의 이행이 늦었었다. 그것은 자주학교가 되면 다시 학교운영이 힘들어지는게 아닌가 걱정하는 일부 동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 대립이 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들 아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최우선이라 생각했고, 또 동포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자주학교로서 권리를 다시한번 싸워 얻은 것이지요.” (김삼호씨)
* 월간<이어> 2015년 7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