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시즈오카(静岡)조선초중급학교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10 시즈오카(静岡)조선초중급학교
(글 이상영)
2014년, 창립50주년을 맞이한 시즈오카조선초중급학교(시즈오카 시).
현재, 현내 유일한 조선학교인 이 학교가 1964년에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는 시즈오카현에서 민족교육의 뿌리가 되었던 하마마츠(浜松)조선초중급학교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 새 교사건설 진행중 운동장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시즈오카조선초중급학교 여학생들(1966년) -
예전에는 고급부도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치유되지 않은 과거 조선인강제연행의 상흔·시즈오카현 편(癒されぬ過去 朝鮮人強制連行の傷跡)>에 수록된 <시즈오카현의 재일조선인 인구 조사표>(1945년 11월 1일자)에 따르면 조국해방 직후 시즈오카현에는 15,690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같이 시즈오카에서도 해방 직후부터 현내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잇달아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1월, 하마마츠시(浜松市)에서 야학 형식의 학교가 학생 30명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46년 2월에는 하마마츠 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이 되는 「하마마츠 조련학원(浜松朝連学院)」이 개교.
이 학교 창립 45년 기념지에 따르면 목조 판자건물 교사(부지 40평)에 학생 60명, 교원 3명으로 시작했다.(초대 교장은 이계백(李季白)씨)
같은 해 6월 1일에는 누마즈시(沼津市)에 조련누마즈초등학원(미시마(三島)조련소학교로 기록된 자료도 있음)이 개교했다.
- 하마마츠 조선초중급학교(1952-71)와 중급부 제1기 졸업생(1955년 3월 졸업) -
이듬해 47년 4월 23일, 하마마츠 조련학원의 새 교사가 준공된다. 부지 면적 370평(건평 100평), 학생 수 약 180명, 교원 7명, 교실은 7개. 불과 1년 만에 학생 수는 3배, 부지면적은 9배로 늘어났다. 게다가 1년 후에는 중급부가 병설되어 학교명도 하마마츠 조선인중소학교로 바뀌었다.
49년 10월 19일, 일본정부와 GHQ(연합군최고사령부)에 의해 <학교폐쇄령>이 내려진다. <조선학교의 전쟁사 1945~1972>(김덕룡 저)에 따르면 시즈오카 현에서는 하마마츠 이외에 미시마조련소학교, 조련 산엔(三遠)소학교, 다카마츠(高松)초등학교, 타마치(田町)초등학교, 시미즈(清水)조선인학교가 폐쇄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마마츠조선인중소학교는 동포들이 투쟁한 결과 폐쇄당하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하마마츠 조선초중급학교 연혁사).
55년 1월에는 고급부가 병설되어 교명도 시즈오카조선초급학교, 시즈오카조선중고급학교로 개칭했다. 당시 학생수는 약 110명이었다고 한다. 고급부는 6년 후인 61년에 폐지되지만, 결코 넓지 않은 지역인 시즈오카에 고급부까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현내 동포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를 말해준다 하겠다.
- 초대 시즈오카조선초중급학교-
어수선했던 개교
59년 북으로 귀국사업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모국어를 배우고 싶은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모여들어 각 학교에서 학생수가 급증한다.
각지에서 새 교사와 새 학교가 잇달아 세워졌다. 시즈오카현에는 서쪽의 하마마츠에 학교가 있었지만, 시즈오카현이 동서로 길기 때문에 현 동부와 중부에서는 멀었고, 어린 학생들이 통학하기에 곤란했다. 이 때문에 현에 또 하나의 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64년 4월 1일, 시즈오카시 나카지마(中島)에 시즈오카 조선초중급학교가 개교한다. 이에 따라 하마마츠의 학교는 하마마츠 조선초중급학교로 개칭되었다.
도쿄조선 제3초급학교 교육회 고문인 김주우(金柱宇 70)씨는 도쿄조선중고급학교의 사범과를 졸업하고, 시즈오카초중급이 개교하던 해에 부임해 그 후 시즈오카와 하마마츠의 두 학교를 오가면서 13년간 이 지역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개교 전날 학교를 찾아가니 공사 중인 장비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자재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였지요. 교문도 울타리도 없고, 운동장도 정비되지 않았어요. 일단 목조 가건물 교사를 세우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칠판도 책상도 의자도 없는 상태였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운동장을 넓히고, 기숙사도 만들었어요. 겨우 학교다운 모습이 된 건 3년 후 새 교사가 세워지고 난 다음이라 할까.”
이씨의 말에 의하면 개교 당시 전교 아동·학생수는 약 130명. 주로 시즈오카 시내와 시미즈(清水), 후지(富士), 누마즈(沼津), 시마다(島田) 등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대부분은 일본학교에서 온 편입생으로 하마마츠에서 온 전입생은 20명 정도였다고 한다.
시즈오카시에 학교가 세워지고 기숙사도 생겨서 그때까지 하마마츠에 있는 학교에 다니던 일부 아동과 학생들 그리고 지리적 제약으로 일본학교로 통학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도 한꺼번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전 목조 교사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새 교사 건설계획이 나오게 되었다.
67년 7월 1일, 1,200평의 부지에 철근 3층 건물로 새 교사가 준공. 이전의 가교사는 기숙사로 개조했다.
이 시기 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교원들은 이즈반도(伊豆半島) 지역까지 찾아가 대대적으로 학생들을 모집했고, 전성기인 60년대 말에는 전교 학생수가 300명 가까이까지 불어났다. 기숙사생들만 100명 정도였다고 한다.
- 60년대 시즈오카초중급학교 중급부 학생들이 스쿨버스를 배경으로 촬영 -
동포들의 손으로
「시즈오카조선학교·벗들의 모임(静岡朝鮮学校友の会)」이 발행하는 회보에 연재 된 <시즈오카의 조선학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静岡の朝鮮学校はこうして始まった!)>에 학교의 초창기를 알고 있는 관계자들의 귀중한 증언이 실려 있다.
2013년 발행 제3회 연재에 개교 당시 동포 홍봉희(洪鳳喜)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교사 건설비용, 토지비용, 학교 운영비, 교원의 급여, 교재비 등을 어디에서도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포들 스스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김치 만들기 강습회를 여는 등 온갖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지요. 서쪽으로는 텐류(天竜), 하마마츠(浜松)부터 동쪽으로는 아타미(熱海)까지 현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답니다. 어느 곳을 가든 아무리 생활이 힘들어도 찾아간 우리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는 동포들 뿐이었지요. 가는 곳마다 식사를 대접해 주거나 따듯하게 맞아주었어요 … 당시 동포들은 현금이 없어 수표까지 발행해 기부했어요. 그 중에는 파친코점 하나를 처분해 돈을 기부해준 사람도 있었어요. 개교 당시는 돈이 부족해 토지를 조금밖에 살 수 없었지만, 그 후 조금씩 구입해 나갔어요. 학교가 3면이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을 만드는 일 등은 모두 동포들의 손으로 직접 했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시즈오카와 하마마츠 2교 체제가 이어졌으나, 94년에 하마마츠가 시즈오카로 통합되어 현내 조선학교는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시즈오카 초중급학교는 47년 만에 새 학교 교사로 다시 태어났다.
* 월간<이어> 2015년 10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