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

[스크랩] 「소년의 나라(少年の國)」-제16화

화진혁 2015. 12. 22. 00:28



16화 마음 주머니

 

   내란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에서 오는 연락도 줄어들고 우리 가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이런 생활을 더더욱 힘들게 하듯 할머니의 백내장이 진행되어 갔다. 할머니는 집안에서는 용케도 손으로 더듬어 물건을 잘 찾으셨다. 돈만 있으면 안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용돈을 달라고 졸라댔다. 전에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을 땐 귀여운 손자가 조르면 무리를 해서라도 응해 주셨지만, 이 시기에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할매, 용돈 좀 주세요.”

 

이 한 마디만으로도 할머니는 애를 태우셨다. 온돌 방바닥을 손으로 치면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좋을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쩔 수없이 더는 조르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왜 용돈이 필요했냐면 어떻게든 갖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점점 거칠어지면 그런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분명히 반영되는 것이다. 아이들도 거친 놀이에 열중하게 된다. 이 무렵엔 장난감 총이 유행했다.

 

마을에 있는 막과자 점방 앞에는 브리키에서 나온 <백연발>이라 불리는 장난감 총이 진열되어 있었다. 종이로 말은 화약을 장전하면 그 화약이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 총을 쏠 수가 있었다. 총알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폭발음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친구들 몇 명도 그것을 갖고 있어서 그 아이들의 총격전에 나도 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젠 손으로 만든 대나무 잠자리 같은 목가적인장난감은 시시해진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할머니에게는 어지간히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스러울 뿐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걸어서 2시간 쯤 걸리는 과수원까지 가서 거기서 사과나 배, 채소 같은 것을 구해 돌아오는 길을 이용해 행상을 했다.

나는 눈이 불편한 할매를 돕기 위해 행상을 갈 때는 늘 함께 따라 다녔다. 할매는 과일이 든 무거운 바구니를 머리 위에 이고 돈이 많을 것 같은 집을 찾아가서,

 

방금 딴 맛있는 과일이랑 채소가 있어요. 한 번 보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과일을 팔기도 하고 쌀과 교환하기도 했다. 과일을 사주는 집에는 고맙습니다. 이걸로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고 몇 번 씩 머리 숙여 인사했다.

 

물론 나도 옆에서 할매와 함께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 집이나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쪽이 많았다.

어느 날 유복해 보이는 근사한 집을 발견하고 대문 옆에서 오물을 퍼내는 작업을 하고 있던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어른 계십니까? 계시면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맛있는 과일과 채소를 갖고 왔어요.”

 

나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그 남자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시끄러! 꺼져!”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뿐이 아니다. 막 퍼낸 오물을 나와 할매의 발밑에 뿌린 것이다.

 

무슨 짓이에요!”

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냐, 그 눈초리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건방지게!”

 

남자는 다시 오물통에 바가지를 넣더니 당장이라도 뿌려댈 기세였다. 나는 분해서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그 때,

 

해수야, 그만 둬라!”

할매가 허둥지둥 내 손을 붙잡았다.

 

그치만, 할매!”

그만 두라니까,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할매는 이렇게 말하고 불편한 눈으로 잠시 남자를 쳐다본 후,

죄송합니다.”

하고 깊게 머리 숙여 사과하고 과일이 든 바구니를 머리위에 이었다.

 

해수야, 가자.”

그치만, 할매, 이런 일을 당했는데.”

 

나는 오물로 더러워진 바지와 할매의 치마저고리 소매를 가리켰지만, 할매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알았으니까 그만 가자하고 내 손을 끌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걷기 시작했다.

 

할매, 왜 저런 사람한테 사과를 하는 거에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는데.”

 

나는 할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할매의 눈에 분에 겨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근처 개울가에서 오물을 닦아내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할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미안하구나 해수야,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할매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

너한테까지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하고, 할매가 한심하구나. 네 엄마 곁에 있으면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을. 해수야, 미안하다, 미안해.”

 

할매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몇 번이나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할매, 난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왜냐면 난 할매가 정말 좋으니까, 과일 행상도 할매와 함께 하니까 재밌어요.”

 

할매는 물끄러미 나를 보셨다.

 

해수야, 넌 정말 착한 애야, 근데 할매는 이젠 안 되겠구나, 이만한 일로 울기나 하고, 할머니가 부끄럽구나.”

왜요? 어째서 부끄럽다고 해요?”

해수야

할매는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셨다.

할매가 늘 너한테 울지 마라, 울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런데 이까짓 일로 분해서 눈물을 보이기나 하니 쓰겠어.”

 

나는 할매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히죽 웃고는,

할매, 나도 울면 안 된다는 얘길 들었지만, 몰래 울기도 해요, 그러니까 할매도 실컷 울어도 괜찮아요.”

……

그리고요, 제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실컷 울고 나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주위 경치가 무척 깨끗해진 기분이 들거든요. 틀림없이 눈 속에 있는 쓰레기가 말끔히 씻겨서 개운한 거에요.”

 

할매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니까 할매도 실컷 울고, 그다음엔 개운해지면 되는 거에요.”

해수야.”

할매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넌 정말 강해졌구나, 강하고 착한 아이야.”

강하고 착하다고요? 할매, 착한 사람은 강하지 않은 거 아녜요?”

그렇지 않단다

 

할매는 개울물에 수건을 헹궈서 가만히 내 바지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었다.

 

강한 사람이야말로 착하단다, 마음에 커다란 주머니를 갖고 있거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강한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마음 속 주머니에 담고서 결코 화를 내거나 울지 않는단다.”

 

나는 신기한 듯 내 가슴 언저리를 보았다.

 

할매도 이젠 울지 않으마, , 남은 과일을 모두 팔아서 오늘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을 가서 집에 가자꾸나.”

 

할매는 일어나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해수야.”

!”

나는 허둥지둥 할매의 손을 이끌고 작은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저녁 언제나처럼 우물가에서 선화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마음의 주머니라

, 강한 사람은 마음 주머니가 크대, 선화는 어떻게 생각해?”

,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해.”

정말?”

내가 눈을 반짝이자 선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럴꺼야 좋아, 그럼 나도 좀 더 마음 주머니가 커지도록 노력해야지!”

 

나는 이렇게 말하고 공기를 힘껏 들이마셔 가슴을 부풀렸다.

 

해수 너두 참

선화가 재밌다는 듯 웃더니,

 

, 맞다.”

주머니에서 작은 엽서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선기 오빠한테서 오늘 온 거야.”

우와, 멋지다, 그럼 오빠가 잘 있다는 거네.”

, 여러 가지 일들이 있긴 해도, 잘 지내고 있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선화에게 엽서를 받아 그것을 읽어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거기에는 곱게 쓴 편지글 다음에 어지간히 서툴게 그린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화, 이 토끼는?”

정말 못 그렸지, 나를 위해서 오빠 나름대로 열심히 그려준 거긴 하지만.”

정말?”

 

나는 찬찬히 엽서를 읽고 난 후,

오빠도 힘든데, 선화를 무척 걱정 하고 있네

맞아, 오빤 늘 그렇거든.”

 

선화는 내게서 엽서를 받아 들고 행복한 듯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그럼 오빠도 분명 마음 주머니가 큰 거야.”

, 그럴지도. 정말 착한 사람이야, 그래서 진짜 좋아

 

나는 기뻐하는 선화를 보고 내 일처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선화야, 선화야!”

 

언제나처럼 선화를 부르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와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 되었다.

 

, 지금 들어가요!”

선화가 허둥지둥 물통을 부둥켜 들고,

 

그럼 해수야, 내일 또 만나.”

하고 말한 뒤 몇 걸음 걸어간 곳에서 문득 돌아보았다.

 

해수 너도, 오빠한테 지지 않을 만큼 착해.”

?”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착한 사람이 정말 좋더라

 

부끄러운 듯 그 말을 남기고 물통을 안고 뛰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화가, 좋아한다고 했다진짜 좋아한다고

 

나는 편안해진 표정으로 웃으며 물통을 들고는 그날 일어난 안 좋은 사건 따위 깡그리 잊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제17화로 이어집니다


출처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글쓴이 : 정미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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