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 _ 욧카이치조선초중급학교 (글 이상영)
강한 애교심으로 지킨 우리학교
1962년, 각지의 조선학교에서 최초 ‘모범교원집단’과 ‘모범교육회’ 칭호를 받고,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욧카이치초중급학교. 이 학교의 시작은 좁은 가축 우리, ‘폐쇄령’ 이어서 미에현 내 유일한 우리학교를 사수하기 위해 분투한 동포들이 있었다. 6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이 학교의 초창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마이너스’에서 스타트
미에현(三重県)에서 민족교육의 시작은 46년 현 내 각지에 설치되었던 국어강습소부터이다.
날짜는 정확치 않으나 쿠와나시(桑名市)에 최초의 강습소가 설치된 것에서 이곳을 본교로 하는 인식도 많다.
나바리(名張), 히사이(久居), 카메야마(亀山), 쿠마노(熊野), 츠(津), 이가지구(伊賀地区)등에도 분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 욧카이치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이 되는 「우리학교(ウリ學校)」욧카이치쿄호쿠(四日市橋北) 분교는 46년 9월 1일에 아쿠라가와(阿倉川)의 동포가 소유한 가축우리 한 켠을 빌려 시작되었다. 초대 교장은 조고환(曺高煥)씨.
“처음 우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대량으로 쌓여있는 소똥 냄새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어... 달리 장소가 있었다면 이곳을 학교로 써달라 했어도 안 했겠지.”
현존하는 자료 「미에현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자주성을 단단히 지켜온 우리학교(필자 불명)」에 조고환씨의 증언으로 그 당시 모습을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아이들과 함께 좁은 우리를 대청소하자고 독려했다. ‘제로’에서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스타트 한 것이다.
조고환씨의 딸 조남숙(曺南淑, 73)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우리말을 배우며 즐겁게 보낸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해방 후 조선반도로 귀환에 따른 동포 수 감소함에 따라 47년 초반부터 각지의 강습소가 축소된다. 동포 수가 많았던 욧카이치시에서 추계연합운동회를 실시하고, 타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쿄호쿠분교로 전학시킨 후 <조련 욧카이치쿄호쿠초등학원>으로 개칭했다. (47년 11월)
48년에는 아동수가 80명을 넘자 동포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교사 설립 요망이 높아졌다.
-50년대말 교원들(뒷줄 왼쪽끝이 박천수씨, 세번째가 허남석씨, 앞줄 왼쪽 끝이 조남숙씨)-
모금운동에 앞장 선 <피스(담배) 1갑 운동>
48년 10월, 박근생(朴根生)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학교건설기성위원회가 발족.
시와의 교섭 결과, 아쿠라가와역(阿倉川駅) 동쪽으로 약 2천 평의 토지를 할당 받았다. 이 무렵 동포들 사이에서 확산된 것이 <피스 1갑 운동>―피스 담배 1갑 가격(당시 60엔)을 토지대금과 학교건설비용으로 모금하자는 운동―이었다. 1갑 가격을 1구좌로 한 모금운동에 현 동포들이 하나 되어 운동을 펼쳤다. 아이들도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 협력했다고 한다. 이것이 조선학교지원운동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1구좌 1,000엔 운동>의 시초라 한다.
학교건설은 조금 높은 언덕을 깎아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삽으로 흙을 퍼내 땅을 평평하게 골랐다. 당시 어른들과 함께 땅파기를 했던 허남석(許南石, 77)씨는 부지 한쪽에서 많은 인골을 발견했다고 한다. 인근에 있던 형무소에서 사체를 매장하는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49년 9월 1일, 드디어 「욧카이치조선인학교」가 완성된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에 전념하던 활동가로 건설운동에 깊이 종사했던 하재남(河在南, 94)씨는, “너무 감격스러워 잠을 못 잤지. 역 앞을 가슴 쫙 펴고 당당하게 걸었어. 많은 사람의 힘이란 건 위대한 것이야.” 라며 당시 심정을 이야기한다. 운동장에서는 연회가 열리고, 민요와 민족 악기 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그러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같은 해 9월 8일 「단체등규정령(団体等規正令)」이 내려져 조련과 민청이 강제해산 된다. 혼란 속에서 뒤이어 10월 19일에는 「조선인학교 폐쇄령」이 내려진다. 미에현에서는 학교가 접수 당하는 것은 피했지만, 12월말에 완전히 교문을 닫아야 했고, 저항투쟁을 일으켰던 교원과 동포들은 거의 체포되었다.
학교를 지킨 아이들
‘폐쇄령’이 내려질 당시 8살이었던 조남숙씨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일본학교에 가면 일본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했다고 회고한다. 많은 아이들이 일본학교로 분산 입학되었지만, 조씨를 포함한 몇 명의 아이들은 일본학교로 전학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13명이 남아 자신들끼리 ‘학교’를 이어가기로 정했다. 교사 문에 X자로 붙여진 나무판을 뜯어내고 안으로 몰래 들어가 지낸 적도 있다.
“공부라기보다 언니오빠들이 동생들을 돌보며 하루 종일 놀았어. 어른들은 모두 일하러 나갔으니까, 어린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었지. 알고 있는 조선말과 간단한 산수를 가르쳐 주기도 했거든. 다함께 손을 잡고 경찰서까지 자주 갔었어. ‘선생님 돌려줘, 선생님을 돌려줘’라고 외치러…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 이 13명이 학교를 지킨 거야.” 아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허남석씨의 말이다.
- 새로 건설된 <욧카이치조선인학교> 앞에서 학교폐쇄 직전에 촬영한 단체 사진 -
동포들의 저항활동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50년 5월 초순에는 미에현이 학교 운영을 계속하는 것을 묵인하게 되었다. 학교를 다시 찾은 순간이었다. 다만, 쿠와나(桑名)를 비롯해 현 내에 남아있던 다른 학교는 최종적으로 폐쇄되어 이때부터 욧카이치시에서 유일한 조선학교로 운영하게 되었다.
학교는 재개되었지만 교원들에게 줄 급여나 비품을 마련 등 운영상황은 열악했다. 동포들은 학교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욧카이치 시장을 찾아가 보조금 지급을 위한 시찰을 해주도록 요청했다. 52년 11월, 시장과 교육장이 학교를 방문해 학급편성과 교육내용, 경비 등의 통계와 교육장의 소감을 적은 「사숙 욧카이치 조선인소학교 시찰보고서(私塾四日市朝鮮人小学校視察報告書)」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이 학교 교육을 충분히 감시하고,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경영비 일부를 경영주체인 PTA(학부모회)의 사업비로라도 기부해 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관리체제적인 기술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조금’ 지급이 실현되었다. 55년 4월, 중급부가 병설되고, 57년에는 <욧카이치 조선중급학교>가 된다. 그 후 교원인 박천수(朴天守, 82)씨가 교가도 만들었다.
더불어 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처음으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왔다. 공화국으로 귀국운동이 활발해져 60년에는 학생수가 461명까지 늘어났다. <폐쇄령>이 내려진 시기에 학교에 남았던 13명 가운데 허남석씨, 조남숙씨를 포함한 3명은 이 학교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힘껏 공헌하게 된다.
- 62년 특별수학여행으로 니가타항의 귀국선을 참관한 초급부6학년 학생들 -
현재 욧카이치초중급학교에서는 초장기에서 현재까지 역사를 자료와 증언으로 알아보는 연혁사 정리가 이뤄지고 있다. 작업을 하는 이는 초대 교장인 조고환씨의 증손인 신정춘(申正春, 27)씨다. “창립 70주년을 맞는 2016년까지는 작업을 완료해 미에현 동포사회에 공헌해 온 사람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남기고 싶다.”는 목표를 전했다.
* 월간<이어> 2015년 3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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