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입니다”
우린 일본 조선학교 학생입니다
2015.09.17. 권해효
2002년 금강산에서 열린 ‘청년학생통일대회’에 사회자로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우리 생전에 통일될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이 많던 때였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남과 북의 청년들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정리할 즈음, 하염없이 울고 있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어디서 온 친구들이야?
“우리는 일본의 조선대학교 학생들입니다.”
일본에 있는 조선대학생? 일본에도 ‘조선대학교’가 있나? 이 아이들은 우리말을 참 잘 하는구나. 그런데 이 아이들은 왜 이리도 서럽게 울고 있지?
많은 것이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아이들이 가슴을 치면서 흘리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아주 조금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왜 그리 서럽게 헤어짐을 슬퍼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2014년 몽당연필 소풍 in 히로시마 공연. ⓒ몽당연필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과
조선학교
2015년 현재,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는 유치원 38교, 초급부 53교, 중급부 33교, 고급부 10교, 대학교 1교가 있습니다. 병설학교가 많아 소재지 기준으로 64개교에 해당합니다. 학생수는 재일조선인 전체 약 20만 명 중 8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한 때 학생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 1960년대 약 4만여 명에 161개교였다고 하니 동포들의 민족교육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식민지 시기,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연행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해방 전 재일조선인의 수는 240여만 명에 달했다고 하네요. 그런 1세분들이 일본땅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들은 고국으로 오기 위해 ‘국어강습소’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은 고국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할 줄 알았지만 자녀들은 일본학교만 다녀 우리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국어강습소가 지금 ‘조선학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민족교육의 첫 시작, 쯔찌우라조선소학교(1947년). ⓒ몽당연필
240여만 명 중 60만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약 97%가 남쪽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해방 후 남쪽의 사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좌우 대결과 학살의 흉흉한 소문이 귀향 발걸음을 주춤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GHQ)는 재일조선인의 귀향 조건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일본에 두고 가라 명했습니다. 동포들은 당분간 민족교육을 유지하며 귀향으로 미루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져 귀향길은 점점 요원해지게 된 것이죠.
그 60만 명의 재일조선인은 비록 고향에 돌아갈 길은 멀어도 자신들이 해방된 민족임을 자각했습니다. 우리학교(조선학교)만은 지키자는 일념으로 ‘차별’이라는 두터운 벽에 맞서 지금까지 조선학교를 유지해왔습니다.
1946년 창립한 가와사끼조련초등학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몽당연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교과서 어느 구석에도 ‘조선학교’와 ‘민족교육’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학교를 만나는 순간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힙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해방 후 지금까지 한시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않은 적이 없던 '분단'의 그늘. 아마도 이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조선학교가 왜 북에 가까운 학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해방 후 70년 동안 조선학교가 어떤 차별에 시달려 왔는지는 이후에 연재되는 글들에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북에 가깝다고 하여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조선학교 역시 우리의 역사 중 일부분입니다.
내 마음의 빨래터 조선학교
2002년 금강산에서 갑자기 제 마음 속으로 들어 온 조선학교는 이제 저에게는 한 번 방문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나면 마음의 찌든 때가 사라지는 ‘마음의 빨래터’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번잡하고 현실이 두려울 때마다 아이들을 떠 올리면 다시 용기가 납니다.
조선학교에서 제가 마음이 깨끗해지는 이유는 ‘차별’을 딛고 꿋꿋이 이겨나가는 모습도 아니요, ‘이 지구상에 어느 민족도 해내지 못한 타국에서의 정연한 민족교육 체계를 70년간 지켜냈다’는 놀라운 발견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그들을 처음 알았을 때 느꼈던 충격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늘 마음속에 동경하며 바라마지 않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쟁’이 없는 학교
조선학교는 경쟁보다 ‘조화’를 가르칩니다. 물론 조선학교에도 시험과 성적 경쟁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육에서 진행되는 시험, 경쟁과는 조금 다릅니다.
조선학교 시험성적은 학급 전체 평균을 내 다른 지역 조선학교, 같은 학교 다른 학년, 학급과 경쟁합니다. 자연스레 자기의 성적보다 반 전체 성적이 소중해집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성적이 떨어지는 친구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밤을 새 함께 공부합니다. 이것이 조선학교의 집단주의 경쟁 방식입니다.
‘나 혼자 잘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라는 이런 평범한 진리를 어릴 때부터 배워나갑니다.
이런 시스템은 단지 시험성적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이루어집니다. 지각이나 결석을 유난히 많이 하는 동무를 위해 스스로 회의를 열고 사정을 헤아려 함께 등교할 순번을 짭니다. 일본학교에서 편입해 온 동무가 우리말을 못해 우리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교과서 전체를 일본말로 번역해 줍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이런 정신을 습관처럼 몸에 익히는 아이들입니다. 약육강식이란 무기를 학교에서 익히는 것이 교육이라고 배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2014년 몽당연필이 방문한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 아이들의 소공연 모습. ⓒ몽당연필
아이들의 부모님들, 그러니까 재일동포 2세, 3세 부모들은 ‘내 아이’라는 말보다는 ‘우리 아이들’ 이라는 말을 씁니다. 선생님께 뭔가를 부탁할 때에도 학부모회에서 어떤 행사를 준비할 때에도 저 같은 사람들에게 학교 사정을 설명할 때에도 ‘우리 아이들’이라고 하지 결코 ‘내 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학교에서 일 년에 한번 씩 하는 운동회가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학부모가 아니라도 그 지역의 동포들이라면 누구나 학교 운동장에 모입니다. 비록 내 아이가 이미 졸업을 했다고 해도 운동회는 ‘우리 아이들의 운동회’인 것입니다.
주말이 되면 어머니들은 김치를 함께 만들어 시장에서 팔고 그 수익으로 학교에 칠판과 컴퓨터를 들입니다. 아버지들은 가뜩이나 오래 된 학교에 비가 오면 물이 새지나 않을까 교사 보수에 팔을 걷어 부칩니다. 쥐꼬리만한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좋은 옷도 사 입기 힘든 선생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그런 어른들이 하는 말, ‘학교를 사랑하자’, ‘1세 동포들이 만들고 지킨 우리학교’, ‘동무를 내 몸과 같이’ 등이 단지 말로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우리는 조선학교가 완벽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많은 어려움과 모순,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란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려 70년을 살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유·초·중·고·대학까지 정연한 교육체계를 만들고 지켜오며 ‘자본주의 무한경쟁’에도 자리를 내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이라도 저는 충분히 대단하고 충분히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몽당연필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2011년 일본에서 일어난 거대한 지진과 그에 따른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은 우리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을 달리하고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국에서도 ‘함께’하는 손길이 닿았습니다. 무려 600백억 원에 해당하는 구호기금이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난 센다이 지역, 원자력발전소가 있던 후쿠시마에 ‘우리학교’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었습니다. 언론에도 잘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답답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받았을 ‘아픔’에 몸서리쳤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였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이 기회에 조선학교를 아는 행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자.”
노래 부르고 영상 만들고 함께 눈물 흘리며 우리학교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몽당연필’을 만들었습니다. 당장 지진을 이겨낼 용기를 주자고 멀리 바다건너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반짝하는 도움이 아니라 길게 하고 싶었습니다. 서로에게 1년을 약속했습니다.
2014년 몽당연필 소풍 in 히로시마 콘서트. ⓒ몽당연필
총 12회의 ‘권해효와 몽당연필’ 토크 콘서트, 6회의 대규모 지역 콘서트 ‘소풍’, 그 외에도 작고 큰 여러 문화활동은 1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콘서트에만 참가한 사람들이 전국에 걸쳐 1만5천여 명, 참가한 공연자 60여 팀이었죠.
마지막 소풍콘서트를 2012년 6월 도쿄에서 동포들과 아이들, 일본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저희는 소임을 마치고 물러나려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계속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해 말 저희는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에 등록해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몽당연필은 이제 약 360여 명의 회원이 아기자기하게 꾸려가는 ‘회원 중심의 자발적 시민단체’로 조금씩 활동을 넓히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한 강연 활동, 역사배우기, 관련 문화 활동, 각종 소모임, 그리고 한 해에 한 번씩 일본에서 개최하는 ‘소풍콘서트’까지.
몽당연필이 지향하는 ‘조선학교와 우리의 만남’은 거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합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어도 놓지 않는 손과 손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 일에 함께 할 분들을 찾습니다.
조선학교를 안다는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조선학교를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미래를 보다 세심하게 여는 일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다른 분들의 소중한 글에서 이를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5년 가을 문턱에서
권해효
“조선학교 아이들과 맞닿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몽당연필
“조선학교 아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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