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8 오사카(大阪)조선제4초급학교
(글 이상영)
가난에도 굴하지 않고,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인 집단거주 지역인 오사카(大阪) 이꾸노구(生野区)의 코리아타운 남쪽에 위치한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
2016년 창립 70주년을 맞는 이 학교 연혁에는 학교를 지키고 이어가려 한 동포들의 심정이 드러나있는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 오사카제4초급의 전신인 조련이꾸노제10우리학교 개교일에(1946.6.11) -
미유키모리(御幸森)조선소학교
2006년에 발행된 학교창립60주년기념지에 따르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이듬해인 46년 6월 11일, 지금의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의 전신인 조련(재일조선인연맹) ‘이꾸노(生野)제10우리학교’가 탄생한다. 이곳은 이 학교 초대교육회회장으로, 후에 초대교사건설위원회의 위원장도 역임한 현봉조(玄奉朝)씨의 공장이다. 학생 120여 명, 교원은 8명으로 출발했다. 학교 창립기념일은 이날로 정하고 있다.
조련에 의해 민족교육의 체계가 정비됨에 따라 아동·학생 수가 점점 증가했다. 이를 계기로 교사 건설이 시작된다. 이듬해 47년 6월 11일, 창립 1주년을 기념해 학교의 현소재지에 목조건물의 교사(校舍)가 완공되었다.(부지 646평, 아동·학생 150여 명, 교원 9명) 새 교사 건설을 계기로 학교명을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로 개칭했다.
46년 당시, 이꾸노구(生野区) 내에 조선학교는 10개 정도였고, 현재의 오사카제4초급학교의 학구(츠루하시(鶴橋), 모모타니(桃谷), 카쓰야마(勝山), 나까가와니시(中川西))에는, 조련 이꾸노 제1우리학교(츠루하시), 제9우리학교(카쓰야마), 그리고 제10우리학교가 있었다.
제1우리학교와 제9우리학교는 47년에 통합되어 츠루하시조선학원(鶴橋朝鮮学院)이 된다.
그 후 48년, 4·24교육투쟁을 거쳐 49년 10월 19일에 발령된 <조선학교폐쇄령>에 의해 미유키모리조선소학교는 일시적으로 문을 닫게 된다.
농악대가 마을을 돌며 학생 모집
학교 폐쇄 이후 교사 일부는 동포단체의 사무소로 이용되고, 일부는 동포들이 사는 아파트가 되었다. 학교는 자주적으로 오후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50년대에 들어서자 학교재건의 요망이 높아진다. 재건을 위해서는 아동·학생들의 확보가 급선무였다. 학교관계자들은 동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다운 방법으로 학교 재건에 발 벗고 나섰다. 그중 한 가지가 농악대를 동원한 학생 모집이었다.
- 지역동포들이 학교 재건을 호소하기 위해 편성한 농악대 -
동포 고경자(高敬子, 70)씨는 학교가 재건되고 입학한 3기생이다.
학교가 재건된 54년에 같은 이꾸노구 내에 있던 샤리지(舎利寺)조선초급학교에서 4학년 반으로 전학 왔다. 고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파트로 이용하던 교사 벽에는 헐리웃 배우의 포스터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요. 학교를 재건한다고 해서 매일같이 스무 명 정도 아이들이 그 포스터들을 떼어 내고 바닥도 닦으며 청소를 했죠. 그 일이 끝나고 나면 학생모집 활동을 했어요. 머리에 고깔을 쓰고 농악대로 분장을 한 선생님과 학부형들이 북과 꽹과리를 울리며 동네 골목을 서커스단처럼 줄지어 누볐지요. 동포들에게 학교 재건을 호소하는 동시에 집집마다 돌며 돈이나 쌀을 기부 받기도 했어요. 풍악 소리가 들리면 돈을 내는 것이 싫어서 문을 잠가버리는 집도 있었지만, 주머니에 가득 담은 쌀을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요즘 학교지원 활동은 바자회나 화려한 행사들이 많은데 옛날엔 이런 식으로 활동을 했었죠.”
54년 4월 1일, 200여 명의 아동을 맞이한 학교는 <폐쇄령> 이후 4년 반 만에 문을 열었다. 동포들이 모은 돈으로 교실 2개가 증축되었다. 미유키모리와 츠루하시에 있는 두 조선소학교 중에 재건 된 것은 미유키모리 학교뿐이었다.
“아이들의 가정형편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데다 선생님의 급료를 만족스럽게 줄 수도 없었죠. 그래서 날이 저물면 학교로 가서 ‘선생님, 밥 드시러 오세요~’하고 데리러 갔어요. 변변한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고경자씨)
학교 시설이 빈약해 ‘조선학교, 누더기학교’란 소리는 으레 듣는 말처럼 당연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유리창이 전부 깨져 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가난해서 소풍을 못가는 아이들도 있었거든. 그럴 땐 츠루하시에서 비누를 구해 와서 반 친구들이 모두 그걸 팔아 번 돈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소풍을 갔었지.”
예상치 못했던 사고
57년, 북한에서 처음으로 교육원조비를 보내왔다. 59년 12월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만 이런 일들을 계기로 미유키모리조선초급학교 또한 아동수가 급증한다.
61년 4월에는 학교명을 히가시오사카(東大阪)조선제4초급학교로 바꾸고, 같은 해 8월부터는 1,200만 엔의 예산을 투입해 2층짜리 목조 새 교사 건설을 시작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61년 9월 16일, 사망·행방불명자 208명, 부상자 4,972명, 61,901채나 되는 주택이 전파 또는 반파되는 큰 피해를 낸 제2 무로토 태풍 때문에 공사 중이었던 학교건물의 골조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 공사중인 학교 골조가 무너진 직후의 모습 -
- 태풍에 무너져버린 학교 골조 복구에 나선 동포들(1961. 9)-
츠루하시역 앞에서 김치를 파는 야마카메(山亀)상점을 운영하는 임신출(林申出, 85)씨는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재건공사가 상량까지 끝난 상태였는데, 그게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어. 우리 집 지붕도 날아가 버렸을 정도니까 엄청난 태풍이었지. 아버지는 성격이 급한 분이셔서 곧장 학교로 달려가셨지. 그길로 직접 복구에 나섰어.”
60주년기념지에는 ‘건설업자는 태풍으로 무너진 학교를 정리하는데 한 달 이상 걸린다 했는데, 학교에 모여든 300명의 동포들이 3일 만에 끝내고 골조를 다시 세웠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완성된 교사는 1960년에 철골 4층 건물(현재 교사)로 바뀌었다. 이때도 지역동포들이 <1분회 1교실>운동(분회 한 곳이 교실 하나의 건설비용을 맡음)등에 힘을 쏟았고 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월간<이어> 2015년 8월호에서.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소년의 나라(少年の国)」-제1화 (0) | 2015.09.12 |
---|---|
[스크랩] 「소년의 나라(少年の国)」-원작 소개 / 프롤로그 (0) | 2015.09.12 |
[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가와사끼조선초급학교 (0) | 2015.08.26 |
[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도쿄조선제9초급학교 (0) | 2015.08.25 |
[스크랩] 「우리학교 이야기」치바조선초중급학교 (0) | 2015.08.22 |